사방이 어둠일지라도 희망의 꽃은 핀다!

건국대학교병원 유방암 환우회 ‘에델바이스’ 이혜경 초대 회장

김은식 기자 승인 2021.10.10 17:06 의견 0

'누구한테 잘못한 것도 없고, 정말이지 누구보다도 똑바로 산다고 살았는데 왜 내가 암이지?'

그런 생각이 드니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귀찮고, 그냥 유방암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도 다 싫었다. 그러다가 웃음 치료가 있다고 해서 그냥 어떻게든 웃어보려고 갔다.

그런데 막상 웃으려고 가니 그렇게 눈물이 났다. 누가 울라고 한 것도 아닌데 계속 눈물이 났다. 그런 나를 보고 웃음 치료 강사님은 계속 울라고 했다. 울고, 울고 또 울어서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야 한다고 했다.

통곡하듯 울고 또 울었지만, 누구도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모두가 속으로 나와 함께 울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도 암에 걸리기를 원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암에 걸리더라도 나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모두가 그런 마음이지만 암은 달빛도 평화로운 한밤에 도둑처럼 찾아온다. 건국대학교병원 유방암 환우회 '에델바이스'의 이혜경 초대회장처럼 말이다.

누구에게나 암은 절망이요, 사형선고다. 이 회장 역시 그 심정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암은 일상의 소중함을 알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해준 선물 같은 고통이라고 고백한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가 에델바이스 초대회장에서 이제는 미술학 박사까지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가며, 이제는 유방암 환우들의 희망이 되어주는 이혜경 회장을 엠디포스트가 만났다.

갑자기 찾아온 유방암, 그리고 칠흑같은 절망의 날에서 구해준 주치의의 약속

"암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덩어리가 거칠어요."

근래 들어 갑자기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피곤해서 여성병원을 찾아 초음파를 찍었는데, 결과를 보더니 아무래도 큰 병원으로 가보라면서 원자력병원 백남선 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얼마 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에서 종합검진을 받을 때만 해도 'Perfect'라며 손가락을 치켜세워주었는데 유방암이라니…

그때가 이혜경 회장의 나이 고작 48세,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내심 결과가 잘못되었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나마 이 회장은 백남선 교수가 직접 수술을 한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이혜경 환자,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유방암 초기니까 내가 무조건 낫게 해줄게요."

암의 크기가 0.5cm 정도라고 하니 충분히 수술로 가능하다고 했다. 2007년 10월 26일, 모두의 걱정과 기도, 그리고 잘 될 거라는 믿음으로 이 회장은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막상 수술에 들어가 가슴을 열어보니 암이 림프샘으로 전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일찍 발견한 것이 감사한 일이지만 그 말은 곧 길고 긴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술이 끝나기 무섭게 11월부터 6개월간의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첫 번째 항암은 견딜만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고, 가족들과 가까운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항암 치료부터는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영 힘을 쓰지 못하는 게, 정말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정말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엄습했고, 그 뒤로부터는 삶을 위한 전력투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했던 때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항암 치료와 함게 방사선 치료를 병행해야 효과가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1월부터는 33회의 길고 긴 방사선 치료에 들어갔다.

처음 일주일간은 5분도 안 되게 치료를 했는데, 이후 영상의학과에서 이 회장에게 암의 위치가 한 번에 방사선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했다.

이쪽저쪽으로 대여섯 곳을 쬐어야 했고, 한번 할 때마다 30분 이상씩 걸렸다.

"제가 무슨 실험실에 청개구리도 아니고, 살겠다고 드러누워 있는 제가 한없이 처량해 눈물이 났어요."

이 회장의 우울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월로 넘어가면서 치료는 특히 더 힘들었다.

'내가 치료를 다 받고도 살 수 있을까?', '원래대로 회복은 될까?', '나는 이제 여기서 끝이구나'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수술받으러 갈 때보다 방사선 치료할 때가 더 힘들었고, 매번 눈물이 나면서 이 회장은 점점 더 무기력해져 갔다.

그렇지만 이 회장의 마음속에 한 가지, 내가 꼭 살려주겠다는 백 교수의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을까, 검사를 마치고 나온 이 회장을 백 교수가 급히 불렀다.

"됐다, 이제 됐어!"

뭐가 된 건지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환자 앞에서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던 백 교수의 모습이 이 회장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유방암이 가져다준 제2의 인생

지푸라기 같은 기대가 희망으로 바뀌어 갈 무렵 백남선 교수가 건국대학교병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혜경 회장도 원자력병원에서 건국대병원으로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어느 날 백 교수가 이 회장을 불렀다.

"이혜경 환자가 수술받은 지도 1년이 되었으니 이제 봉사를 합시다. 한번 유방암환우회를 만들어서 맡아봐요."

"네? 제가요? 아…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백 원장님께서 건국대병원으로 가시면서 유방암환우회를 만들어야겠다는 말씀은 하셨습니다. 원자력병원에는 '새빛회'라고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건국대병원에는 없었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원장님께서 저에게 일 시키려고 그러시나보다 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활기를 찾고 의미있는 일을 하라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 환우회는 저에게 큰 계기가 되었어요."

그전까지만 해도 이 회장은 아이 잘 키우고, 가정 잘 꾸리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다. 만나는 사람도 오래전부터 알던 몇몇뿐이었다. 원래 낯가림도 심했고,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이 회장이 환우회를 맡았다. 환우회의 이름은 '에델바이스'였다.

"에델바이스의 꽃말은 '희망'이에요. 꽃말이 좋아서 'OK' 했죠. 처음 만든 환우회다 보니 원자력병원과 서울대병원 환우회를 많이 참고했어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점 괜찮아졌어요."

환우회라는 게 서로 동병상련인 사람들끼리 모여 고충을 나누는 곳이니 잘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유방암 환우를 찾아 병실로 가면 우리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도 같은 유방암 환자인데 그렇게 모질게 말할 때가 많아요. 청천벽력같은 일을 당했으니 누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하지만 우리도 상처를 많이 받죠. 그래서 차라리 유방암 환자들이 맘 편하게 올 수 있는 상담실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그런 우리의 요구를 병원에서는 흔쾌히 승낙해주었어요. 그 뒤로는 더욱 열심히 했죠."

생판 모르는 남에게 환우회 가입을 권유한 것도 그렇고, 상담실이 필요하다고 당당히 요구하는 이 회장의 모습은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후 이 회장은 환우들과 함게 노력한 결과 불과 몇 년 만에 에델바이스 회원을 200명 이상으로 늘렸고, 유방암 환우 중창단인 '핑크리본 레이디 싱어즈'를 만들어 직접 단장을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회장은 한국유방암총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유방암 복원술이 성형수술이 아닌 재건 수술이라는 것을 보건복지부와 국민에게 각인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런 자신을 이 회장은 조금이라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유방암은 그에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제2의 인생을 선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혜경 회장의 변화는 이것이 다가 아니었다.

나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도전도 계속된다!

이혜경 회장은 수술하고 난 이듬해 뭐라도 해볼 요량으로 집 근처에 문화센터를 찾았다. 마침 그곳에 꽃 그림 코스가 있어 등록했다.

"예전부터 미술에 소질이 있는 오빠가 내심 부러웠는데, 이참에 나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특별한 건 없었어요. 그냥 무작정 해보고 싶었어요."

이후 우리는 무작정 해본다는 게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 지 알게 된다.

2008년 지금 사는 판교로 오면서 이 회장은 기왕이면 조금 더 잘 그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수채화 선생님을 만나 5년을 계속 그렸고, 이후에는 유화 물감이나 다른 재료로도 충분히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은 자신이 유방암 환자라는 사실을 잊게 했고, 한번 시작하면 대여섯 시간은 금세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이 붙었다.

그러다 보니 취미보다는 제대로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론적인 것은 물론 미술에 대한 형식과 지식을 쌓고 싶었다.

가족의 응원으로 이 회장은 2015년 중앙대학교 미술대학원에 입학, 2년 반 동안의 공부를 마친 그는 석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뭔가 손에 닿을 듯 닿을 듯하면서, 여기서 손을 접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미 내 나이도 있고, 자꾸 제 욕심만 채우는 것 같아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도 했죠."

이때가 이 회장의 나이 59세, 하지만 이번에도 가족은 그의 편이 되어주었다. 거기에다 박사 과정에는 예순이 훨씬 넘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라는 말에 이 회장은 용기를 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이 회장은 박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논문과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 회장이 그림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미술학 박사가 된 것이다.

"사실 유방암이 아니었다면 이런 지금의 제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을 거에요. 그림도 그리게 되었고, 세상을 보는 눈도 많이 달라졌죠.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래서 더 긍정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다 꿈같고 기적 같은 일이다.

백남선 교수와의 인연부터 유방암 환우회의 회장을 맡은 일, 오열하는 32세의 젊은 아기 엄마 환우의 등을 다독여 준 일, 처음 간 웃음 치료 모임에서 눈물이 말라버릴 때까지 오열했던 일, 에델바이스 환우회 소식지를 만들어보겠다며 원고를 받으러 다녔던 일, 웃음 치료와 미술치료를 알리는 유방암 홍보 강사 자격증을 받던 날, 지금은 의사가 되어 있는 아들이 엄마를 위해 의대를 가겠다고 하던 날, 유방암 환우들과 함께 울면서 한라산 정상에 올랐던 일 모두 하나도 잊혀지지 않는다.

만약에 이 회장이 암 환자가 아니었다면 이 모든 일이 가능했을까? 물론 암이란 녀석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다. 암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서 이 모든 일을 해낸 이 회장의 의지가 다만 존경스러울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회장이 암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환우회를 하면서 많은 환자를 보았습니다. 5년이 아니라 20년이 지나서 암이 다시 재발한 환우들 말이죠. 암과의 싸움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 그때처럼 마냥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저의 도전도 계속 될 것입니다."

아주대 부설 아주심리상담센터 초대 소장을 역임한 이민규 박사의 베스트셀러 '1%만 바꿔도 인생이 달라진다'는 '모든 가능성을 다 시도해봤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능성은 남아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한 번, 아니 몇 번을 쓰러졌다고 해서 그것이 실패는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 실패는 없다. 오늘 만난 이 회장처럼 말이다.

사방이 모두 어둠일지라도 희망은 있다. 절망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이 회장과 환우들이 함께 만든 에델바이스, 하지만 진정한 희망은 에델바이스 환우 한 송이 한 송이 모두다. 이혜경 회장 역시 많은 환우에게 희망을 전하는 에델바이스가 되어 또 다른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또 살아갈 수 있는 용기가 되어주는 이혜경 회장의 위대한 도전에 그를 지켜보는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으로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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