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제 그 꿈을 꾸려 합니다!

시와 수필, 의사문인 신동아의원 신종찬 원장 INTERVIEW

김은식 기자 승인 2020.04.28 15:53 | 최종 수정 2021.02.19 21:00 의견 0

미끼

어딘가에 잠겨 있는 것에게는 모두
미끼를 던질 수 있다고 일단 생각해보자

산을 낚으려 미끼를 던진다
하늘을 낚으려 미끼를 던진다
미끼가 아니어야 꽃다운 미끼다

너희들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만
너희들은 내 존재를 모른다

전화가 울린다
어눌한 목소리가 이제 세련되게 변했다
미끼를 미끼가 아니라 한다

미끼가 미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순간
미끼에 물려버리고 만다

세상은 미끼들로 넘친다
미끼를 던진 자가
제 미끼를 물리기도 한다
미끼는 마냥 미끼가 아닌 세상이다

- 신종찬 作 -


“저는 오래전부터 소중한 꿈을 하나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 꿈은 아무나 꿀 수 없기에, 꿀 수 있는 잠자리에라도 들어가 보려 오랫동안 애써 왔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벽두에 이제 잠자리에 들면 ‘그 꿈을 꿀 수 있을 만하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꿈꾸던 그 소중한 꿈을 꾸려 부지런히 잠자리에 들어가 보려 합니다. 그 꿈은 좋은 시를 쓰는 일입니다.”

의사 문인으로 그동안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아온 신종찬 원장(서울 신동아의원장, 한국의사수필가협회 부회장)이 詩 전문지 <예술가>의 2020년 공모전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개인병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환자를 돌보면서도 꾸준히 수필을 발표하고, 그런 중에서도 ‘시인’의 꿈을 놓지 않았던 신 원장의 등단은 그야말로 문학에 대한 열정이 보여준 아름다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예순 중반의 나이지만 누구도 늦다고 말하지 않고, 신 원장 자신도 ‘소중히 여기고 소임을 다하라는 뜻’이라며 소박한 시인의 겸손을 잊지 않는다.

평생을 함께하면서도,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던 문학에 대해 야속할 법도 하지만 이제야 꿈을 꾸기 위해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이라며 또 한 줄의 시를 쓰고 있는 신종찬 원장을 엠디포스트가 만났다.

이육사李陸史의 시를 보며 문학의 꿈을 꾸다!

신종찬 원장의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어린 시절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육사李陸史 선생의 시비詩碑가 있었다.

어린 소년은 낙동강 변을 거닐며 그 시비에 적힌 ‘광야’와 ‘청포도’를 좋아했는데, 예전 조부님과 친분이 있었던 그 저항 시인의 어른들에게서 자주 듣곤 했다.
그러면서 소년은 ‘언젠가는 나도 이육사 선생님처럼 멋진 시를 쓰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고, 그 동기 자연스럽게 사유思惟 세계의 귀향점으로 설정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사정은 시와 문학에 대한 동경을 충분히 채워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초등학교 시절 운문부에 들어갔지만, 문학 수업은 고작 한두 시간이 전부였다. 교내 동시 공모에 당선이 되었지만, 결국 시골 학교는 그저 시골 학교일 뿐이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올라가며 서서히 시에서 멀어져가고 있을 때쯤 소년에게 잊지 못할 사건이 생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만해卍海 한용운 님의 시 ‘알 수 없어요’에서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라는 시구를 보고 한참을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죠.”

그 한 줄의 시어는 소년의 시에 대한 갈망을 깨웠고, 그때부터 다시 시를 써야겠다는 꿈을 꾸게 된다.

의사에게 문학은 사치인가?

신종찬 원장의 고교 시절은 문학과 함께였다. 학업에서도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얻을 정도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분명 문학의 길을 걷게 되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바람은 주변의 그것과는 달랐고, 그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의대에 진학하게 된다.

물론 의대 진학 후에도 문학에 대한 열정은 쉽게 식지 않았다. 끊임없이 잡지에 투고하고, 시간이 날 때면 언제나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전공의가 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밥 먹을 시간, 잠잘 시간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말 그대로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던 그 시기는 결코 신 원장에게 문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문학은 그에게 사치였다.

이후 그는 전문의를 거쳐 의학박사를 취득했고, 미국 Wake Forest 의과대학의 연구원 선임되었고, 이후 그곳의 여러 과정을 수료한다.

그렇게 신종찬 원장은 문학도가 아닌 모두에게 인정받는 의사의 길을 걷게 된다.

세상의 모순에 부딪혀 뒤돌아보았을 때, 그곳에 문학이 있었다!

“의사의 길을 걸으며 문학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았습니다. 오십이 넘자 겨우 제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심각한 일들이 엄습해 왔습니다. 세상은 진실이나 본래의 의도와는 아주 다르게 평가받고 흘러갔습니다. 더없이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열매 또한 진주 같은 나무를 ‘쥐똥나무’라는 동물의 배설물로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낙인烙印들이 제 삶에도 일어났습니다.”

오로지 연구와 진료,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신종찬 원장, 하지만 2000년 당시 의료계를 향해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그야말로 그에게 큰 혼란이었다. 아니 신 원장뿐만 아니라 모든 의료인에게는 충격이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문학이 있었다.

신 원장은 그동안 묵혀두었던 열정에 불씨를 되살리며 2010년 4월 <에세이플러스>를 통해 등단했고, 이후 <서울의 시골의사>, <안동, 까치구멍집으로 가는 길>, <신종찬의 글쓰기 틀> 등을 발간하며 활발한 활동을 해 나갔다.

그 외에도 ‘청년의사독서캠페인’, ‘한국해양수필문학상’, ‘보령수필문학상’, ‘계간문예문학상’, ‘한미수필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의사 문인으로의 자리를 굳혀갔다.

더는 부족함이 없어 보이던 신 원장, 하지만 그에게는 늘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이 남아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시였다.

시인 신종찬, 삶의 의미에 질문을 던지다!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무척 헤맸습니다. 그 해답을 찾기에는 수필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좀 더 함축성 있는 말로 삶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신종찬 원장이 바라는 문학의 바탕에는 시가 있었다. 수필을 쓰면서도 그는 늘 시와 함께했다. 하지만 시는 그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동안 열 차례가 넘게 문예지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 이유를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모든 예술은 경향이 있으니 시대가 변하면 글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신 원장은 납득이 갔다.

“아무래도 제가 체계적으로 문학 수업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독학으로 시를 써왔으니 지금의 관점에서는 구식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부족함이 보이면 채워야지요.”

그런 말을 들으면 분할법도 한데 신 원장은 오히려 이를 토대로 더욱 성숙한 시를 쓰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 <예술가>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을 하게 된 것이다.

스스로 낮출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이 그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었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결코 늦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십에 능참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늦게 얻은 벼슬이지만 소중하게 여기고 소임을 다하라는 뜻이겠지요. 저에게 ‘시인’이라는 임무가 주어졌으니 부지런히 시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

신종찬 원장은 문학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있지만, 그가 전하는 시와 수필은 우리에게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 겸손한 시인이 던지는 질문이 바로 삶의 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한걸음 한 걸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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